세월의 흔적은 있습니다.
더 궁금 하시면 전화 주십시오.
구봉령(具鳳齡. 1526(중종 21)∼1586(선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柏潭). 문정공(文貞公) 휘(禕)의 8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좌승지 중련(仲連)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겸(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회(檜)의 딸이다.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1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초상집례(初喪執禮)에서 어른을 능가해 마을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외종조 권팽로(權彭老)에게 『소학』을 배워 문리를 얻고, 1545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ㆍ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ㆍ봉교(奉敎)를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이르렀다. 1564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해 수찬ㆍ호조좌랑ㆍ병조좌랑을 거쳐, 1567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정언ㆍ전적ㆍ이조좌랑ㆍ사성ㆍ집의(執義)ㆍ사간을 두루 거치고, 1573년(선조 6)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동부승지ㆍ우부승지ㆍ대사성ㆍ전라관찰사ㆍ충청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7년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ㆍ형조참의를 지냈다. 1581년 대사헌에 오르고, 이듬해 병조참판ㆍ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는 한때 암행어사로 황해도ㆍ충청도 등지에 나가 흉년과 기황(飢荒)으로 어지럽던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동서의 당쟁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문에 뛰어나 기대승(奇大升)과 비견되었고, 또한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만년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학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죽은 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담문집』 및 그 속집(續集)이 있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