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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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21일, 치안국 조사실.
한하운이 건장한 풍체를 이끌고 조사관들 앞에 나타났다. 세간에 떠도는 풍문에 대한 조사가 장시간 이어졌다.
이튿날, 치안국장은 기자들 앞에서 뜻밖의 발표를 한다.
“한하운은 실존 인물이다.”
“한하운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기자들은 한하운이 조사를 받으며, 문제가 된 ‘데모’라는 시의 한 구절은 “자기의 시집을 출판한 이병철이 승인없이 고친 것”이라고 해명했다는 말을 전했다. “한하운 시초”를 편집, 발간했던 이병철이 허락도 받지 않고 문구를 고쳐 인쇄했다는 것이다.
한하운이란 인물이 숨은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문제는 꽤 오랫동안 항간을 떠돌았다. 1953년 11월 20일 개최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조차 이에 대한 질의가 이어지자 한하운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한하운시초”였다. 1949년 초판을 발행했던 한하운의 1호 시집 “한하운시초”는 1953년 6월 재판을 찍었다. 당초 잡지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실린 것을 정음사에서 그 해 5월 책으로 출판했다. “신천지”는 “서울신문”이 발행하던 종합잡지다.
한하운의 시를 세상에 처음 내놓은 이가 이병철이었다. ‘한하운 시를 엮으면서’란 해제를 통해 한하운을 소개하며 13편의 시를 모아 잡지에 수록한 이병철은 월북했다. 월북 시인의 손길이 닿은 시집을 휴전회담이 한창인 때 재판으로 발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내심 이병철을 공격의 타깃으로 삼았다. 한하운의 시 중에서도 ‘데모’란 제목의 시가 주목받았다.
뛰어 들고 싶어라
뛰어 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江물속으로
물구비 파도소리와 함께
萬歲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물구비 제일앞서 피빛 기빨이 간다
뒤에 뒤를 줄대어
목쉰 조선사람들이 간다.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쌀을 달라! 自由를 달라!는
아우성소리 바다소리.
아 바다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싶어라 죽고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재판본 “한하운시초”에서 이 시는 ‘데모’라는 제목 대신 ‘행렬’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시의 일부도 삭제된 채 수록됐다. ‘쌀을 달라! 自由를 달라!는’ 행은 삭제됐고,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부터 ‘아우성소리 바다소리’까지의 연 하나는 통째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한때 전위시인으로 이름을 알린 이병철이 한하운이란 가상 인물을 통해 다시 서울로 잠입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병철을 통해 연상되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휴전협상은 진행되지만 전선에서는 아직 양 군 사이에 고지전이 멈추지 않았다. 휴전 전야에 등장한 “한하운시초”와 이로 인해 발생한 ‘한하운 사건’은 역설적이게도 이병철의 그림자를 벗고 한하운을 세상에 홀로 서게 하는 기회를 줬다. “한하운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란 치안국장의 발표 후, 한하운은 다시 부평으로 돌아가 시작과 한센인 자치 사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2년 뒤인 1955년 시집 “보리피리”를 발간했다. 출처 - 한하운 온라인 문학관
도서명 | 한하운시초 초판본 재판본 두 권 일괄판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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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하운 |
출판사 | 정음사 |
크기 | 상품페이지 참고 |
쪽수 | 상품페이지 참고 |
제품구성 | 상품페이지 참고 |
출간일 | 1949-53 초판 재판 |
목차 또는 책소개 | 상품페이지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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