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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소설 - 어느 한국인의 일생 요약정보 및 구매

서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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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Editions Agence Korea
출간일자 1929
책장 창고방1-1
판매가격 1,5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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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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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낙장 하드카바로 다시장정 제본상태가 삐뚤삐뚤 뒷쪽 판권은 없고 앞쪽에 1929년 이라고 되어있음 프랑스어로 되어있음 일제시대인 1920년, 19살 때 프랑스로 떠났다... 그리고... 일찍 깨어 있었던 용기 있었던, 한국인 한 사람의 셀라비(c'est la vie ) 영원한 독립운동가, 한편의 영화 같은 인생을 산 서영해(徐嶺海·1902~? 본명은 희수(羲洙 ). 독립운동사 연구가 중 서영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그의 이름은 불문학자나 외교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다. 그만큼 서영해의 독립운동 방식과 삶은 특이했다. 아니 그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 바로 그 자체였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약 이승만이 아닌 김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됐다면 남북한을 통틀어 서영해만한 외무부 장관감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02년(고종 39) 1월 13일 부산(釜山)에서 영주동 「서약방」주인인 서석주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석주는 10남매를 두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아들은 넷째 아들인 서영해였다. 서영해는 부산 공립 보통학교를 나온 뒤 개화사상에 눈을 떠서 해외로 나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다. 1919년 17세에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서영해는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맡고 있던 김규식 박사를 찾아가서 앞으로의 처신에 대한 도움을 청했다. 김규식은 동래 출신으로서 일찍부터 그의 부친인 서석주와 친교가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영해는 애초 미국 유학을 바랐었다. 김규식은 그러나 세계 외교 무대 중심을 이루고 있던 프랑스로 갈 것을 권했다. 당시 국제외교는 국제연맹이 있는 파리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서영해는 김규식과 장건상, 조소앙 등 선배의 권고를 받아들여 프랑스로 가는 여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인 양자가 돼서 국적을 바꾸었다.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서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파리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 파리 위원부가 있었는데 위원부 대표 김규식이 1919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간 후, 이관영과 황기환이 차례로 업무를 맡았으나, 1921년 7월 황기환이 미국으로 떠난 후 활동이 중단되었다. 유학생 서영해는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학생들과 임시정부 수반 김구 선생 사이에 연락 업무를 하게 되었다. 서영해는 프랑스에서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10년 과정을 고학하며 6년 만에 졸업했다. 그는 저널리스트가 돼 보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파리에 있는 일간 신문 기자 채용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서영해는 1929년 파리에서 고려통신사(高麗通信社)를 설립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駐) 프랑스 통신원으로 활약하며 유럽 각국에 일제의 강탈과 만행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29년 프랑스어로 한국의 역사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을 집필했다. '백승조'-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 소설은 단군신화로부터 구한말 국제정세와 청일, 러일전쟁 등이 묘사된, 소설이라기보다 일종의 당시 한국 상황 보고서였다. 독립선언서 전문이 불어로 번역돼 실려 있는 이 소설은 한국인 최초의 불어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영해는 또 34년 ‘흥부와 놀부’ ‘심청전’ ‘토끼의 간’ 등 우리 전래 동화와 우리의 풍물을 소개한 ‘거울-불행의 원인’이라는 책을 불어로 출간했다. 서영해는 프랑스 국내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기자로 이름이 알려졌고 중동 방면에 수시로 특파되어 국제보도진으로 진출했다. 특히 서영해는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났을 때 스페인 총통인 프랑코가 좌파와 충돌하면서 무기가 부족해 곤경에 빠져 있었을 때 자신이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함부르크 항구에서 개인 자격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무기를 인수하고 스페인으로 운반해 들여 오는 일을 도왔던 것이다. 프랑코 정권이 수립된 뒤 서영해는 프랑코 총통으로부터 국빈 자격으로 초대받은 끝에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의 명예 시민증을 얻었다. 1934년 4월 2일 임시정부 각의는 외무 규정을 채택하고, 주미 위원부 대표에 이승만을, 주불 위원부 대표에 서영해를 임명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주 프랑스 외무행서(外務行署)로 유럽 각국의 요인들에게 한국의 정세를 널리 알리고, 한국의 독립에 관한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고 훗날 1944년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산하 주 프랑스 예정대사(豫定大使)로 선임되어 역시 한국의 독립과 관련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의 외교에 있어서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 서영해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외교적 능력은 탁월했다. 서영해의 조카 서정인씨는 “큰아버지는 불어는 물론, 영어 중국어 독어 등 7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했다”고 말했다. 1945년 3월 프랑스 정부가 임시정부와 외교 관계 수립을 요청하자, 같은 달 12일 임시정부 주 프랑스 대표로 선임되어 8·15광복 때까지 계속 외교를 통한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서영해는 이승만이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와 연애 당시 편지를 전달해 주는 등 이승만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이승만보다 김구를 더 추종했다. 해방후 임정 요인과 함께 귀국한 그는 김구, 조소앙, 장건상 등과 어울려 고국에서 해야 할 일을 도모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김구·김규식이 추진한 남북협상에 통신사 기자 자격으로 방북을 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47년 연희전문(현 연세대)과 경성여의전(고대 의과대) 이화여전(이화여대) 등에서 틈틈이 불어를 가르쳤다. 그는 당시 일본인이 만든 불어 교재를 모두 버리고 자신이 직접 타자기로 ‘초급 불어’라는 교재를 만들어 가르쳤다. 그에게 불어를 배운 제자가 극작가인 차범석씨와 김동길 전 연대 교수,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 등이다. 그는 일본을 극도로 싫어해 일식집에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48년 부산에서 당시 26세의 경남여중 교사 황순조와 결혼했다. 조카 서정인씨는 “사실 큰아버지는 프랑스 유학중 소련 여학생과 결혼해 딸까지 뒀으나 귀국할 때 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리 집안이 부산의 교육자 집안이어서 자연스럽게 일본 유학을 마친 여선생님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서영해는 김구의 암살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데다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회의를 느껴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는 작업을 추진했다. 조카 서정인씨는 “큰아버지는 김구가 암살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비슷한 처지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며 “특히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만들려고 할 때 면전에서 심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영해 부부는 48년 10월 서울을 떠나 프랑스로 가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서 부인의 프랑스 여권을 기다리는 사이, 장개석 정권이 무너지면서 상하이가 공산화됐다. 한국인은 모두 억류 상태가 됐고 49년 11월 정부차원의 막후 협상끝에 한국행 수송선이 왔다. 그러나 당시 중국 국적의 여권을 가진 서영해는 중국인으로 간주돼 귀국하는 배에 타지 못하는 기막힌 처지가 됐다. 서영해는 부인에게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시오, 오늘같은 안타까움도 웃어 넘길 만큼 행복하게 살아봅시다”라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서영해의 소식은 끊어졌다. 혼자 한국으로 돌아온 부인은 교사로 복직, 40년 동안 소식없는 남편을 기다렸다. 부인은 경남여고 교장을 끝으로 교직을 마치고 간직했던 남편의 책과 저서 등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는 등 신변을 정리하고 89년 세상을 떠났다. 서영해의 이런 비운의 행적은 1987년 ‘주간한국’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서영해의 그후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50년대에 북한을 방문한 프랑스인들이 평양에서 불어를 대단히 잘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그들이 만난 사람이 바로 서영해인 것으로 짐작된다. 북한에서의 서영해의 활동이나 생사 여부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조카 서씨는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고 북한으로 갔다는 얘기도 있지만 중국 병사설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조카 서씨는 94년 큰아버지의 행적을 모아 독립유공자 상훈을 신청했고, 정부는 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 어느 한국인의 일생 » (Autour d'une vie coréenne, 189 p.) 이 책은 주 프랑스 임시정부 홍보국 격인 아장스 코리아 출판부 (Editions Agence Korea)에서 1929년에 출판했다. 불어 제목 밑에 « 한국 역사 소설 »이라고 한글과 한자를 섞어 내리썼다. 이 작품은 소설도 아니고, 또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역사서도 아니다. 그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으로 보이는데, 열열한 애국심으로 한국의 독립을 변호하는 점이 돋보인다. 이 작품의 제1부에는 '백승조-박선초'라는 애국 지사의 항일 운동이 묘사되어 있고, 제2부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통한 한국 생활의 기록이다. 양산 통도사 방문기, 결혼식 묘사 다음에 일본인의 잔학성을 고발했다. « 인권, 자유, 약소국가의 독립,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같은 것은 적당히 짓밟아도 된다고 여기는 열강들의 위선 »을 비꼬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인들의 애국적 거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정명훈이 일본 정부 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비 암살 사건, 1919년 4월 15일 일본인들이 경기도 수원 부근 제암리 마을을 불질러 파괴한 행위, 순천에서 집 40채, 경기도 화수리에서 집 25채에 방화하여 파괴한 사건들도 고발했다. 서울에 사는 서양인들의 한국에 대한 동정어린 증언도 실었다. 어느 영국인의 말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인용했다 : ‘한국인들이 독일인들보다 100년 앞서 금속 인쇄술을 발명했다. (이 부분은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 직지심체요절 »을 두고 한 말일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 직지 »가 1911년 플랑시 컬렉션 경매 때 보석상 베베르에 팔리긴 했지만, 이 책이 쿠랑의 « 한국 서지 »에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영해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보다 100년 전에 측우기를 발명했고, 이순신 장군의 « 잠수함 » (거북선)은 최고의 엔지니어들도 감탄해 마지않는 발명이다.’ 어느 미국인은 한국 민족이 그렇게 수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음에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의 근기와 지구력이라고 했고, 어느 프랑스인은 한국인의 인간미와 외국인에 대한 자발적인 개방성을 칭찬했고, 어느 독일인은 ‘한국은 아시아의 스위스 »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이 책의 끝에 기미 독립선언서가 불어로 번역되어 실려 있다. [출처]

상품 정보 고시

도서명 한국역사소설
저자 서영해
출판사 프랑스
크기 단행본보다 조금작음
쪽수 189
제품구성 상품페이지 참고
출간일 1929
목차 또는 책소개 상품페이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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